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영향 == 굶주린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남한]]으로 입국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국경 지대와 가까운 [[함경도]] 출신들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꾸준하지만 적은 수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다. 이 시기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넘어 탈북하는 사람들도 민간인, 군인을 가리지 않고 급증했다. 최전방 군인들조차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탈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원]] 설립이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1995년]]에서 [[1996년]] 사이 이 시기다. 이전까지는 군 정보기관과 [[국정원]]에서 탈북자를 전담 관리했으나 민간인 탈북자가 수십~수백 명으로 늘어나면서 [[통일부]] 주관 민간인 수용시설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 [[여성]]들의 지위가 급상승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장]]이나 기업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 생활이 의무적(?)인 [[남성]]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만 것. 거기에 [[북한]] 정권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성]]들은 "사회주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동하지도 않는 직장에서 자리를 사수하도록 엄단을 했다고. 얼핏 들으면 황당해 보이지만, [[생활총화]]나 상호 감시 등을 유지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가정에서 살림만 하던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 것이 장마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의 경제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었다. 실업자가 되어버린 남성은 '집 지키는 [[강아지]]' 내지는 '낮전등'[* 낮은 밝으므로 전등을 켤 필요가 없으니 [[잉여]]라는 뜻이란다.] 정도로 그 위치가 전락하고 말았고, 여성은 지위가 높아지자 [[이혼]]까지 할 정도로 위치가 높아졌다. 북한 [[북한/인권#여성|여성 인권]]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해당 문서를 읽는 것도 좋다.[* 위치가 높아진 것과는 별개로 북한의 여성 인권은 여전히 [[총체적 난국]] 상태로, 여성 자살률과 성범죄 피해 발생률, 가정폭력 발생률도 높은 편이다.] 타이밍이 묘하게도 [[김일성]]이 죽고 바로 시작된 재앙이라서 상당수 북한의 장년층이나 일부 탈북자들까지도 "[[김정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라는 생각[* [[김정일]]을 그리 비난하던 [[황장엽]]은 적어도 [[김일성]]이 집권을 하던 시절에는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진 않았다며 비난을 하지 않았다. 끝내 황장엽 역시 [[탈북]]을 하게 된다.]을 가진 이들이 많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배급경제가 유지되었고[* 사실 고난의 행군보다는 덜 심각해서 그렇지 [[https://news.joins.com/article/1455892|1970년대 당시에도 북한에 식량난이 터졌었고 북한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박정희도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진지하게 검토했을 정도였다.]] [[평양]]에서는 그나마 식량을 구할수 있었지만 지방은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천리마 운동]]과 [[속도전]] 등 김일성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무리하게 북한 주민들을 다그쳤기에 발생했었던 것.],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던 1980년대를 겪다가 이런 [[대기근]]을 겪으니 더더욱 잊을 수가 없을 듯. 그러나 김일성의 죽음이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한게 아니라 김일성이 살아 있을때는 차마 체면 때문에 지원 요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야 김정일이 외무성에 지시하여 식량지원에 전폭적인 노력을 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고 한다. 김일성 살아 있던 1994년에 이미 50만이 지방에서 아사했다고 보고가 올라왔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옹호해주기도 힘든 게 김정일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차피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해도 지원을 해주던 동구권이 완전히 붕괴됐고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지속적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전면적인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3년에 [[라진항]]을 특구로 지정하는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펴기는 했다. 경제, 외교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더불어 고난의 행군을 [[쿠바]] 같은 [[북한]]과 동맹이던 나라에서도 "쟤들은 왜 저러냐?" 하고 어이없어한다. 쿠바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가 집주인(은퇴하여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전직 [[외교관]])과 만나 이야기한 경험을 보면, 이 사람이 외교관 시절인 1990년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쿠바는 정말 북한에 견주면 천국이지, 저렇게 굶어 죽는 사람 여긴 없잖아" 이렇게 느끼고 와서 쿠바에 대하여 외국이 뭐라고 비난하면서 코웃음 치면 "북한 같은 나라를 보라고 쯧쯧" 이렇게 반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교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과 친하게 지낸 [[피델 카스트로]]조차 이 일에 대해서는 [[김정일]]은 미쳤다고 욕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과 우호를 다졌고 북한과 일단 우호국이라 외교적으로 대놓고 이러진 못했고, 쿠바 정계에서 "아주 민중을 굶겨 죽이네..."라고 미친 놈이라고 꼴보기 싫다는 투로 투덜거렸다고 한다. 카스트로 역시 서방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인물이긴 하지만 국가적 위기에 [[가톨릭교회]], [[테크노크라트]], [[라울 카스트로]]를 비롯한 당 내 개혁파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최소한 국민들을 굶겨죽이지는 않은 카스트로가 김정일한테 비교됨은 카스트로에게 굴욕이다. 카스트로 말고도 쿠바 내 정계는 물론 다른 친북국가 대다수도 같은 반응이었다. 외교적으로 차마 뭐라고 말은 안 했어도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으니까. 사실 [[쿠바]]도 북한과 비슷한 시기(1993년)에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쪽도 소련에 설탕을 팔고 석유나 공산품을 받아오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소련 붕괴]]로 물가가 폭등하고 식량공급이 대폭 축소되고 전력공급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1994년 반정부 시위와 보트피플 속출같은 난리가 나는 등 원인도 대강 비슷하다. 그래도 쿠바는 유기농 농업이라든지 여러 모로 노력하고, 적어도 북한이랑 다르게 최소한 민중을 굶기는 일은 안 했다. 대대적인 군비 축소까지 하며 배급 제도 같은 기본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은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고, 또한 농업 체계도 개편해서 유기농 농법을 확산시켰다. 북한에서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못하는 사이 쿠바에선 자영업의 활성화 및 관광 산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 북한도 비슷한 조치를 하긴 했는데 2000년대에 와서야 시행했다는 게 문제. 1990년대 중반에도 상당 부분은 시행하다시피 했으나, 이건 사회 통제가 붕괴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인민들이 어쩔 수 없이 장사했던 게 퍼진 것이다. 북한 정부는 그 무렵 어버버 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시행됐다.] 2000년대엔 상당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일단 1990년대 초반의 경제난을 그럭저럭 극복했다. 그에 반해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와중에 산업 기반 및 사회 복지 체계 자체가 전부 0으로 됐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매우 컸고, 2000년대에 와서 겨우 부분적인 자영업 활성화 조치를 했는데 그마저도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핵실험]]까지 더해 [[중국]]의 호황과 [[남한]]과의 경제 교류 확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도 경제를 겨우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돌려놓는 선에 그쳤다. 더욱이 쿠바처럼 군비에 대한 대대적인 축소는커녕 체제 생존과 미국에 대한 유리한 협상의 기회를 얻고자 1998년,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영공을 지나가게 하면서 발사하는 등 공격적인 도발과 핵과 미사일에 대한 투자를 이 때 부터 막대하게 진행했고 [[선군정치]]까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재화가 군수공업에 몰빵되어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로 올인되었다. 마지막엔 김정일 비자금, 쌈짓돈에서도 빼다가 핵개발에 투자할 정도. 이러다보니 북한 경제와 주민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나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체제 변화에 따른 혼란과 침체가 생기긴 했지만, 위기라고는 해도 일단 북한에 비할 수준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속에서도 빈곤 문제는 항상 진지하게 다뤄졌고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은 이루어졌다. 애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완전히 방기해버린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기준으로도 실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탓하지만 당연히 북한이 하는 소리는 그냥 헛소리다. 자력갱생하는 주체적인 나라라면서 타국의 경제 제재가 무슨 상관일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상당부분 제공한 [[김정일]]은 정작 인민들에게는 자신이 줴기밥([[주먹밥]])[*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truth_kim_family/kim_dynasty-01252010113747.html?searchterm:utf8:ustring=%EC%A4%B4%EA%B8%B0%EB%B0%A5+%EC%97%B0%EC%96%B4%EC%95%8C|줴기밥을 자주 먹기는 했는데]], 그 줴기밥이란 게 동유럽산 기름, [[뉴질랜드]]산 [[쇠고기]], [[연어]]알, [[캐비아]] 등을 넣어서 만든, 재료비만 45달러(한화 약 5만원)나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을 먹고 쪽잠을 자며 일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뒤로는 혼자 산해진미란 산해진미는 전부 처먹어서 지금도 두고두고 까인다.[* [[김정일]] 문서로 들어가 [[김정일/여담#s-2.2.1|이 작자가 쳐묵쳐묵한 산해진미 목록을 살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인민군]]이 굶주림을 못 이겨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훔치다 걸려 처벌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지금 내 아들들이 배고파서 한 일을 처벌하겠다는 거냐?"라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 아니 아직도 이어지던 2000년 초반, 경수로 공사로 북한에서 1년 동안 머물던 만화가 겸 전기기술자 오영진이 목격담을 그린 만화 <[[남쪽손님]]>을 보면, 아침을 굶고 온 북한인 노동자가 점심을 먹는데(동석하지는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밥을 푸는 것만 볼 수 있었단다) 적어도 여기 노동자들은 밥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퍼먹는데, 정말 남측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밥을 식판이 넘쳐나도록 퍼가서 먹더란다. 하지만 아침이나 저녁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점심만 엄청나게 폭식하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끝나면 비몽사몽 식곤증으로 제대로 일하지 못하며 공사에 그리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